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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도요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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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마즈 도요히사는 1570년에 태어나, 1584년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첫 출진을 한 무장이다. 규슈 정벌 이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도와라성의 성주가 되었으며, 임진왜란과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으며, 그의 용맹함과 충성심은 여러 기록과 대중문화 작품을 통해 묘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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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도요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시마즈 도요히사
본명시마즈 도요히사 (島津 豊久)
별칭호주마루 (豊寿丸), 다다토요 (忠豊), 덴레이 쇼운 (天岑昌運), 마타시치로 (又七郎)
출생1570년 7월
사망1600년 10월 21일
사망 장소세키가하라 전투
묘소덴쇼지 묘지
관직
직위사도와라 성 성주
임기 시작1587년
임기 종료1600년
선임시마즈 이에히사
기타 직책시종 (侍従), 중무성 (中務省)
가문
가문시마즈 씨
소속도요토미 씨, 서군
아버지시마즈 이에히사
어머니가바야마 요시히사의 딸
배우자시마즈 다다나가의 딸
친척시마즈 미쓰히사 (형제), 시마즈 다다나오 (형제), 자매 ( 네지메 시게히라의 아내), 자매 (사타 히사요시의 아내), 자매 (시마즈 히사노부 & 사가라 요리야스의 아내), 시마즈 다다쓰네 (사촌), 시마즈 요시히로 (삼촌), 시마즈 요시히사 (삼촌), 시마즈 도시히사 (삼촌)
군사 정보
소속 부대시마즈 씨
참전 전투오키타나와테 전투 (1584), 규슈 정벌 (1587), 오다와라 정벌 (1590), 임진왜란 (1592-1598), 세키가하라 전투 (1600)

2. 생애

1570년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호주마루(豊珠丸)였으며, 처음에는 '''시마즈 타다토요'''(島津忠豊)라고 불렸다.[5]

1584년 3월에 벌어진 오키타나와테 전투에 아버지 이에히사를 따라 처음으로 출진하였으며,[7] 같은 해 4월 14일 히고국에서 관례를 치렀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규슈 정벌 이후 아버지 이에히사가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휴가국 사도와라성(佐土原城)의 성주가 되었다. 이후 히데요시를 따라 오다와라 정벌, 임진왜란 등 여러 전투에 참전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약 6년간 조선에 파견되어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1599년에는 시마즈 가문의 내분인 쇼나이의 난(庄内の乱) 진압에 참여하여 무공을 세웠다.[7] 이듬해인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숙부 요시히로와 함께 서군에 가담하였다. 전투에서 서군이 패배하자, 요시히로의 퇴각을 돕기 위해 스스로 적의 추격을 막는 스테가마리(捨て奸) 역할을 맡아 싸우다 전사하였다.[7][12]

2. 1. 어린 시절과 첫 출진

원규(元亀) 원년(1570년)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명(幼名)은 토요스마루(豊寿丸)였으며, 처음에는 '''시마즈 타다토요(島津忠豊)'''라고 칭했으나[5], 후에 토요히사(豊久)로 개명했다. 덴쇼(天正) 11년 4월 11일(1583년 6월 1일), 카미이 가쿠켄(上井覚兼)이 사도와라(佐土原)에 방문했을 때 아버지가 부재중이었기 때문에, 아직 원복(元服) 전이었던 도요히사가 응대하였다.[6]

덴쇼(天正) 12년 3월(1584년 4월)에 벌어진 오키타나와테 전투(沖田畷の戦い)에 아버지 이에히사를 따라 첫 출진을 하였다. 아직 원복을 치르기 전이었으나, 니이로 타다모토(新納忠元)의 후견 아래 적장의 수급(首級) 하나를 베는 공을 세웠다.[7] 이 전투 전날 새벽, 아버지 이에히사는 당시 13세였던 도요히사에게 "훌륭한 무사의 모습이구나"라고 칭찬하며, "다만 띠 매는 법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며 직접 띠를 다시 매어주고 칼로 그 끝을 잘랐다. 그리고는 "만약 전투에서 승리하여 살아남는다면 이 띠는 내가 풀어주겠다. 하지만 전장에서 쓰러진다면, 잘린 띠를 보고 적들도 시마즈 가문 자제의 용맹함을 알 것이고, 나 또한 그 죽음을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8]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부자는 함께 분전하여 승리하였고, 무사히 귀환한 후 이에히사는 아들의 띠를 풀어주었다고 한다.[8]

같은 해인 덴쇼 12년 4월 14일(1584년 5월 23일)에 히고국(肥後国)에서 원복을 치렀다. 덴쇼 13년 12월(1585년 2월), 아버지 이에히사가 도요히사를 포함한 세 형제의 천연두 치료를 위해 카미이 가쿠켄(上井覚兼)에게 약 '소향원(蘇香円)'을 구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2. 2. 규슈 정벌

덴쇼 15년(1587년), 분고국의 다이묘 오토모 소린의 요청을 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규슈 정벌에 나섰다. 이에 맞서 시마즈 도요히사는 아버지 시마즈 이에히사와 함께 1만 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분고국의 쓰루가성(鶴賀城, 현재 오이타현 오이타시)을 포위하였다. 이때 도요토미군의 선봉대로 장소가베 모토치카, 그의 아들 장소가베 노부치카, 센고쿠 히데히사, 소고 마사야스 등이 이끄는 군대(기록상 2만 명 이상이었으나 실제 병력은 약 6,000명으로 추정된다)가 도착했다.

시마즈군은 쓰루가성 포위를 풀고 후퇴하는 척하며 도지가와(戸次川) 인근 숲 속에 병력을 매복시켰다. 시마즈군의 철수를 확인한 도요토미군 선봉대가 강을 건너는 순간, 숨어있던 시마즈군이 기습 공격을 가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도요토미군은 큰 혼란에 빠졌고 많은 병사들이 흩어져 달아났다. 이 헤쓰기가와 전투에서 시마즈군은 격전 끝에 장소가베 노부치카와 소고 마사야스를 전사시키는 큰 전과를 올리며 규슈 정벌 초기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17일(양력 5월 24일), 분고국에서 벌어진 근백삭 전투(根白坂の戦い)에서는 삼촌 시마즈 요시히로 등과 함께 참전했으나 도요토미군의 압도적인 전력 앞에 패배하여 후퇴해야 했다.

결국 시마즈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군 앞에 항복하게 되었다. 항복 직후인 덴쇼 15년 6월 5일(양력 7월 10일), 아버지 시마즈 이에히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이에히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진영에 다녀온 직후 사망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암살이나 독살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덴쇼 16년(1588년), 도요히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휴가국 사도와라(佐土原) 지역을 중심으로 약 979정(町)의 영지를 받아 사도와라성(미야자키현 미야자키시 사도와라정)의 성주가 되었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시마즈 이에히사의 죽음에 대한 불필요한 의심을 피하고자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특별히 지시하여 도요히사에게 영지를 내려준 것이라는 설도 전해진다. 아버지 사후, 도요히사는 삼촌인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친자식처럼 양육되었으며, 그에게 전쟁에 임하는 자세 등을 배우며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다고 전해진다.

2. 3. 임진왜란 참전

히데요시를 따라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한 후,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에도 참전하였다.

1592년(분로쿠 원년) 3월, 기병 30여 명과 잡병 500여 명을 이끌고 부산에 상륙하여 한양으로 향했으나, 조선의 선조는 이미 의주로 피난한 상태였다. 같은 해 5월 초, 강원도 춘천성에 주둔할 당시 약 500명의 병력으로 성을 포위한 6만여 명의 조선군[9]에 맞서 농성하였다. 100여 정의 총을 발사하며 저항했고, 조선군이 성문으로 돌격해오자 500여 명의 병력으로 격퇴했다고 전해진다.[9] 같은 해 5월 20일에는 진주성 공격 명령을 받고 476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진하였다. 1593년(분로쿠 2년) 6월 29일, 여러 장수들과 함께 진주성을 함락시켰으며, 이때 도요히사의 부대가 가장 먼저 성에 진입했다고 한다.

1597년(게이초 2년) 2월 21일, 여러 장수들과 함께 가덕도에 주둔하던 중 다시 출격 명령을 받아 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세 번째로 출정하여 안골포에 진을 쳤다. 같은 해 7월 15일에는 칠천량 해전에 참전하였다. 조선 수군의 세 번째로 큰 배에 뛰어든 도요히사는 "적선에 뛰어올라 적을 삼베처럼 베었다"고 기록될 정도로 격렬하게 싸웠으며, 가신들과 함께 탈취한 전선은 이후 도요토미 정권에 헌납되어 감사장을 받았다. 같은 해 8월 15일에는 남원성 전투에서 선봉에 서서 적장 13명의 목을 베었고, 다음 날 그 증거로 코를 베어 일본으로 보냈다. 같은 해 9월 20일에는 사천으로 돌아와 사천성을 새로 쌓아 수비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울산성 전투에 후방 지원 부대로 참전하였다.

1598년(게이초 3년) 1월, 명나라 군사가 지키는 언양성을 공격할 때 홀로 말을 타고 선봉에 서서 적의 목 2개를 베었으나, 왼쪽 귀 아래에 부상을 입었다. 같은 해 8월, 아키즈키 다네나가, 다카하시 모토타네, 사가라 요리후사와 함께 귀국 명령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21일, 20척의 배를 이끌고 부산 앞바다의 시키시마(椎木島, 현재 위치 불명)에 머물며 백부 시마즈 요시히로 부자를 구출한 뒤 이틀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1592년부터 시작된 6년간의 조선 파견이 끝났다. 1599년(게이초 4년) 2월, 조선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종오위하 중무대보(中務大輔) 겸 시종(侍従)에 임명되었다.

한편, 임진왜란 중인 1596년(게이초 원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도요히사에게 덴쇼 연간 규슈 정벌 당시 납치했던 분고국의 남녀를 인신매매 대상으로 삼지 말고 분고국으로 돌려보내라는 내용의 주인장(朱印状)이 전달되기도 했다.

"지난번 분고에서 함부로 잡아온 남녀의 일을 영지 내에서 찾아 조사하여 돌려보낼 방도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만약 숨겨두는 자가 있다면 죄가 될 것이다. 아울러 사람의 매매는 일절 금지해야 한다. 지난번에도 정한 바 있지만, 거듭 명하는 바이다. 11월 2일 (히데요시 주인) 시마즈 마타시치로(島津又七郎, 도요히사) 루스이(留守居, 부재중 대리인) 앞" - 도요토미 히데요시

2. 4. 쇼나이의 난

게이초 4년(1599년) 3월 29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시마즈 영지로 돌아가 시마즈 요시히사와 상의하라는 명령을 받고 사도와라에 도착했다. 같은 해 6월 상순, 시마즈 타다쓰네가 쇼나이의 난 진압을 위해 출진하자 도요히사도 이에 따라 참전하였다.

도요히사는 시나 나가모토, 무라오 시게히로 등과 함께 야마다성 공격의 대장을 맡아 성을 함락시키는 무공을 세웠다. 게이초 5년(1600년) 3월 15일, 이쥬인 다다마사가 항복하면서 쇼나이의 난은 종결되었다.

이 공적으로 도요히사는 시마즈 타다쓰네로부터 감장과 칼 한 자루를 하사받았다.[7] 난이 끝난 후, 시마즈 요시히사는 도요히사의 군공을 높이 사 노노미야(현 미야자키현 미야코노조시 노노미야마치) 땅을 주려 하였으나, 도요히사는 이를 사양하였다.[7]

2. 5. 세키가하라 전투와 죽음

게이초 4년(1599년)에는 시마즈 가문의 내분인 쇼나이의 난(庄内の乱)에 출진하여 무공을 세웠다.

이듬해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그는 숙부인 요시히로와 함께 서군에 가담하여 참전했다. 1600년 5월 12일(음력), 사도와라를 출발하여 후시미에서 참근(参勤)을 마치고 귀국 허가를 받기 위해 6월 5일(음력) 오사카로 향했다.[7] 같은 해 8월 1일, 요시히로와 함께 서군에 합류하여 후시미성 전투에 참가했다. 후시미성 함락 후인 8월 15일, 후시미에서 이시다 미쓰나리의 거성인 사와야마로 이동하여 미노로 출진했다. 동군이 기후성을 공격한다는 정보에 따라 이시다 미쓰나리는 토요히사에게 에와타노와타(江渡ノ渡) 방어를 요청했다.[10] 8월 23일, 기후성을 함락시켰으나 적이 후방을 차단하려 한다는 정보를 듣고 오가키성 외곽 라쿠타(楽田)로 후퇴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본 전투를 앞둔 9월 14일, 요시히로는 토요히사를 이시다 미쓰나리 본진에 보내 아카사카에 주둔 중인 동군에 대한 야습을 제안했다. 그러나 미쓰나리는 서군이 대군이므로 낮에 평야에서 결전을 벌여야 한다며 이 제안을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는 시마즈 요시히로가 서군에 대한 불신으로 전투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야기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하지만, 2차 사료인 『낙수집(落穂集)』 등에 기록된 내용이며 시마즈 측 기록에는 야습 관련 내용이 거의 없어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기는 어렵다.[11] 그날 밤, 시마즈군은 세키가하라로 진영을 옮겨 9월 15일 새벽, 비가 내리고 안개가 짙게 낀 가운데 이시다 진영에서 약 1정(町, 약 109m)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요시히로도 그곳에서 약 1정 더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전투 직전, 토요히사의 진영에 쵸주인 모리히사가 찾아와 말 위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토요히사는 “오늘은 아군이 약하니 창을 쓸 수밖에 없겠군”이라고 농담하며 서로 웃으며 헤어졌다고 한다. 또한, 이시다 미쓰나리의 가신 야소지마 스케자에몬이 원군을 요청하러 왔을 때, 말에서 내리지 않고 예를 갖추지 않자 토요히사의 가신들이 무례하다고 비난했고, 토요히사 역시 격분하여 “오늘의 공은 각자 세우는 것이니, 그대도 그리 알라”고 소리쳐 돌려보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혼전 중에 한때 요시히로를 놓친 토요히사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안위를 걱정했으나, 이후 다시 합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투가 동군의 우세로 기울자 시마즈 부대는 전장에서 고립되었고, 퇴로가 막힌 요시히로는 할복을 각오했다. 그러나 토요히사는 전후의 어려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숙부 요시히로가 반드시 살아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7] “시마즈 가문의 존망은 의홍 공에게 달려있다. 의홍 공만이 살아남아야 한다.”, “천운이 이미 다했다. 싸운다 해도 패배는 명확하다. 나도 여기서 전사하겠다. 의홍 공은 군사를 이끌고 사쓰마(薩摩)로 돌아가시오. 국가의 존망은 공(의홍) 한 사람에게 달려있다.”라고 말하며[12] 철병을 촉구했다.

결국 요시히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진을 정면으로 돌파하여 이세 가도 방면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다(이른바 시마즈의 퇴각). 이 과정에서 토요히사는 후위를 맡아 동군의 맹렬한 추격을 막아내는 역할을 자처했다. 이는 자신의 목숨을 버려 주군을 살리는 전술인 스테가마리(捨て奸)였다. 이이 나오마사 부대가 추격해오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토요히사는 나카무라 겐스케(中村源助), 우에하라 사다에몬(上原貞右衛門), 토미야마 쇼타유(冨山庄太夫) 등 13명의 기병과 함께 적진에 돌격하여 장렬히 전사했다.[7] 『사번구기잡록(薩藩旧記雑録)』에는 토요히사가 총으로 이이 나오마사를 쏘아 말에서 떨어뜨리고 동군의 추격을 격퇴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피를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13]

시마즈 토요히사의 무덤


한 설에 따르면, 토요히사는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요시히로를 따라 약 9km를 이동했고, 가미이시즈(上石津)의 가시와라(樫原) 부근에서 류리코지(瑠璃光寺) 주지 등의 간호를 받았으나 결국 사망하여 화장된 후 인근 류리코지에 묻혔다고 한다. 현재도 이 절에는 토요히사의 묘가 남아있다. 또한, 전투 직후 안장에 피가 흥건한 채 주인을 잃은 토요히사의 말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찌 되었든 토요히사 등의 결사적인 활약으로 의홍은 무사히 사쓰마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마즈 가문 측에서는 토요히사의 전사를 즉시 확신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오시카와 고우킨에게 허공장보살 참배를 명목으로 토요히사의 생사를 확인하도록 지시했고,[14] 고우킨은 3년 동안 일본 각지를 돌며 토요히사의 행방을 찾았다고 한다.[7] 토요히사의 법명은 천심창운(天岑昌運)이다. 기후시 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세키가하라 합전도 병풍(関ヶ原合戦図屏風)》에는 말 위에서 지휘봉(采配)을 휘두르는 토요히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3. 사후

전쟁 후, 도요히사의 영지였던 사도와라(佐土原)는 후계자가 없다는 이유(무사단절(無嗣斷絶))로 도쿠가와(徳川) 가문에 의해 일시적으로 몰수되었다. 야마구치 나오토모(山口直友)의 요리키(与力)인 쇼다 야스노부(庄田安信)가 잠시 관리(在番)를 맡았으며, 이후 시마즈 가문의 일족인 시마즈 이쿠(島津以久)가 영지를 받았다. 도요히사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가문은 조카의 사위인 키이리 타다히데(喜入忠栄)가 상속했다. 그러나 이 계통은 1624년(간에이(寛永) 원년)에 단절되었다. 이후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다다쓰네(忠恒))의 아들인 히사오(久雄)가 뒤를 이어 에이키치 시마즈가(永吉島津家)를 이루었다.

한편, 1602년에 태어난 조카 시마즈 히사토시(島津久敏)와 그의 아버지이자 도요히사의 처남인 시마즈 히사노부(島津久信)는 시마즈 이쿠(島津以久)가 사망한 후 사도와라 번주 자리를 상속하는 것을 사양했다.

도요히사의 갑옷은 에이키치 시마즈 가문의 당주 시마즈 히사요시(島津久芳)가 1777년(안에이(安永) 6년)에 입수하여 가문의 보리사(菩提寺)인 텐쇼지(天昌寺)에 봉납했다고 전해진다.[15] 현재 이 갑옷은 쇼코슈세이칸(尚古集成館)에 보관되어 있으며,[16][17] 히오키시(日置市) 중앙 시민회관에는 그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4. 인물 및 일화

시마즈 이에히사의 아들로 1570년에 태어났다. 아명은 호주마루(豊珠丸)였으며, 처음에는 시마즈 다다토요(島津忠豊)라 불렸다. 1583년(덴쇼 11년), 14세 때 숙부 우와이 사토카네가 사도와라성을 방문했을 당시 아버지 이에히사가 부재중이었기에 아직 성인식(元服)을 치르지 않은 도요히사가 대신 응대했다고 한다. 그는 성인식을 치르기도 전에 니이로 타다모토의 보호 아래 첫 전투에 참가하여 적장을 베는 등 일찍부터 무장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1584년(덴쇼 12년), 류조지 다카노부가 이끄는 군대와 시마즈-아리마 연합군이 맞붙은 오키타나와테 전투에 아버지 이에히사와 함께 참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시마즈군은 약 6,000명의 병력으로 2만 5천 명이 넘는 류조지군을 격파하고 다카노부를 전사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 전날, 아버지 이에히사는 아들 도요히사를 걱정하여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했지만, 도요히사는 "아버지의 어려움을 알면서 전투 직전에 떠난다면 후세까지 수치가 될 것입니다"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이에 감탄한 이에히사는 전투 당일 아들의 갑옷 매무새를 보며 "훌륭한 무사가 되었구나"라고 칭찬하고, "오늘 승리하고 살아남는다면 내가 직접 이 띠를 풀어주겠다"고 약속하며 격려했다. 전투 후 이에히사는 약속대로 아들의 띠를 풀어주었다고 전해진다. 도요히사는 이 전투에서의 공으로 적장의 명단을 확보하기도 했다. 그는 같은 해 5월 23일 히고국에서 성인식을 치렀다.

1587년(덴쇼 15년), 분고국의 다이묘 오토모 소린의 요청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규슈 정벌에 나서자, 도요히사는 아버지 이에히사와 함께 1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분고국 헤쓰기가와 강변의 쓰루가성을 포위했다. 이때 도요토미군의 선봉대였던 장소가베 모토치카, 장소가베 노부치카, 센고쿠 히데히사, 소고 마사야스 등의 군대(실제 병력은 약 6,000명으로 추정)가 접근하자, 시마즈군은 성 포위를 풀고 후퇴하는 척하며 매복 작전을 펼쳤다. 도요토미군이 도쓰기가와를 건너 추격해오자 시마즈군은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헤쓰기가와 전투에서 도요토미군은 장소가베 노부치카와 소고 마사야스가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로써 시마즈 부자는 오키타나와테 전투의 류조지 다카노부에 이어 헤쓰기가와 전투에서 두 명의 다이묘를 더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는 센고쿠 시대 전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기록이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10일 아버지 이에히사가 갑자기 사망했다. 이에히사의 죽음은 도요토미 진영에서 돌아온 직후에 일어났기 때문에 암살 또는 독살설이 제기되었으며, 일설에는 시마즈 요시히로가 배후라는 주장도 있다. 1588년, 도요히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도와라를 포함한 휴가국 979개 마을의 영지를 인정받아 사도와라 성주가 되었다. 아버지 사후에는 숙부인 시마즈 요시히로가 그를 친자식처럼 아끼며 병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하였고, 1592년부터는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조선으로 건너갔다.

1592년 5월 3일, 기병 약 30명과 잡병 500명을 이끌고 부산에 상륙하여 성문까지 침입했으나, 당시 선조는 이미 의주로 피난한 상태였다. 같은 해 5월 초 강원도 춘천성에서는 약 500명의 병력으로 600명의 조선군을 격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5월 20일에는 476명을 이끌고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여 선봉에서 싸웠다.

1597년(게이초 2년) 2월 21일, 가덕도 주둔 중 재차 출격 명령을 받고 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안골포에 주둔했다. 같은 해 7월 15일 칠천량 해전에서는 조선 수군의 대형 전선 3척에 뛰어들어 격렬하게 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때 빼앗은 전선은 후에 도요토미 정권에 바쳐져 감사장을 받았다. 8월 15일 남원성 전투에서는 선봉에 서서 적장 13명의 목을 베었고, 다음 날에는 전리품으로 베어낸 코를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9월 20일 사천으로 돌아와 사천성 수비에 참여했으며, 12월에는 울산성 전투에서 후위를 맡았다. 1598년 1월 명나라 군사가 방어하는 히코요성 공격 시에는 단독으로 돌격하여 적장을 물리쳤으나 왼쪽 귀에 부상을 입었다. 같은 해 8월 귀국 명령을 받아 11월 21일 부산 앞바다에서 숙부 요시히로 부자를 구출한 뒤 일본으로 돌아갔다. 1599년 2월, 조선에서의 전공을 인정받아 관직에 임명되었다.

1599년 3월 29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영지인 사도와라로 돌아와 시마즈 요시히사와 협의했다. 같은 해 6월에는 시마즈 다다쓰네의 출정 요청으로 쇼나이 전투에 참전하여 니이로 타다모토, 무라오 시게호와 함께 야마다 성 공격의 총대장을 맡아 함락시켰다. 1600년 4월 이주인 타다자네의 항복으로 전투가 종결되자, 이 공으로 다다쓰네로부터 감사장과 칼을 하사받았다. 시마즈 요시히사가 도요히사의 군공에 대한 보상으로 노미야(野々美谷)를 하사하려 했으나 도요히사는 이를 사양했다.

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숙부 시마즈 요시히로와 함께 서군에 가담했다. 8월 1일 후시미 성 전투에 참가했고, 성 함락 후에는 미노국 전선으로 이동했다. 8월 23일에는 기후성을 점령했으나 동군의 후방 차단 움직임에 오가키성으로 후퇴했다.

전투 전날 밤, 요시히로는 도요히사를 이시다 미쓰나리 본영에 보내 동군에 대한 야습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일화가 있으나, 이는 후대의 기록에만 나타나며 시마즈 측 사료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아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9월 15일 세키가하라 전투 당일, 시마즈군은 전투 초반 적극적으로 참전하지 않았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가신 하치지마 스케자에몬이 말을 탄 채 원군을 요청하자, 도요히사는 그의 무례한 태도에 격분하여 "오늘 각자 자신의 공을 세우면 될 것이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전투 중 한때 요시히로의 행방을 놓친 도요히사가 눈물을 흘리며 걱정하다가 다시 합류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전투가 동군의 우세로 기울자 시마즈군은 고립되었고, 요시히로는 할복을 각오했다. 그러나 도요히사는 "시마즈 가문의 존망은 숙부님께 달려있으니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셔야 합니다. 제가 여기서 죽어 시간을 벌겠습니다"라며 요시히로에게 퇴각을 강력히 권유했다. 결국 요시히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진을 돌파하여 이세카이도 방면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도요히사는 이 퇴각전에서 후위를 맡아 추격하는 동군을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특히 이이 나오마사가 이끄는 부대의 맹렬한 추격을 받자, 도요히사는 나카무라 겐스케, 우에하라 사다에몬 등 13명의 기병과 함께 적진에 돌격하여 장렬히 전사했다. 향년 31세. 일설에는 이이 나오마사에게 총상을 입혔다고도 하며,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중상을 입은 채 약 9km를 퇴각하다가 가미이시즈의 가시와라 부근에서 사망하여 인근 류코지에 묻혔다고 한다. 현재도 이 절에는 그의 무덤이 남아있다. 도요히사를 포함한 후위 부대의 필사적인 항전 덕분에 요시히로는 무사히 사쓰마로 귀환할 수 있었다.

도요히사의 사망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시마즈 요시히로는 오시카와 긴치카에게 3년간 전국을 수색하게 하기도 했다. 그의 법명은 텐신쇼운(天眞紹運)이다.

사쓰마번의 기록인 『시즈노오다마키』에는 젊은 시절의 도요히사를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다운 용모뿐만 아니라 지혜와 용맹이 뛰어난 소년"으로 묘사하고 있으며[9], 『삿판큐덴슈』에도 "무쌍의 미소년", "미소년"이라는 기록이 있다.[9] 미나가타 구마구스는 사쓰마 출신 외교관 아라카와 미하루로부터 "시마즈 도요히사는 특히 미소년이었다. 정한(임진왜란)을 앞두고 용사들을 일일이 불러 격려하니, 모두 자신이 주군에게 특별히 사랑받는다고 여겨 맹렬히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기록했다.[18]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교토에 머물다 사도와라로 돌아가기 직전 요시히로의 부름을 받고 합류했지만, 자료상으로 요시히로와의 개인적인 관계가 특별히 깊었다고 보기는 어렵다.[9]

5. 묘소



천신(섬주 도요히사) 공의 무덤(히오키군 나가요시무라(현 히오키시))


시마즈 도요히사가 전사한 장소로 알려진 기후현 오가키시 카미이시즈정 가라스가사카에는 시마즈 타다시게가 쓴 도요히사의 비석이 있다. 또한, 같은 정 상타라 지역에 있는 통칭 "시마즈쓰카"는 도요히사의 묘소로 전해진다.

현지에는 도요히사의 죽음에 대한 다른 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도망쳐 온 도요히사 일행을 마을 사람들이 거절했기 때문에 도요히사는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고, 그 저주 때문에 묘소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또 하나는 완전히 반대로, 필사적으로 도요히사를 간호한 마을 사람들에게 의심이 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자결했다는 이야기이다.

더욱이 미야자키현 사토바라정 및 가고시마현 히오키시[19]에 있던 텐쇼지에도 봉안되어 있으며, 사토바라정 텐쇼지의 과거장 사본에는 도요히사와 함께 전사한 가신의 속명 35명분이 기록되어 있다. 사찰은 모두 폐사되었지만 묘소는 현재도 남아 있다.

6. 대중문화 속의 도요히사

=== 만화 ===



=== 게임 ===

  • 코에이 테크모의 게임 전국무쌍 4에서 시마즈 가문의 일원으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성우는 미야사카 슌조이다.


=== 서적 ===

  • 야마모토 히로후미, 『시마즈 이에히사와 시마즈 토요히사』(가쿠요쇼보 인물문고)
  • 코노에 타카하루, 『충의에 죽다 시마즈 토요히사』(KADOKAWA, 후일 각카와문고)


=== 음악 ===

  • 사쿠라유키, 『증거』(작사: 토오노 유키, 작곡: 이세 켄지)


=== 드라마 ===

=== 영화 ===

  • 『세키가하라』(2017년, 배우: 미우라 세이키)

참조

[1] 웹사이트 佐土原城 http://www.miyazaki-[...] 宮崎市観光協会 2019-07-25
[2] 웹사이트 島津忠長娘(島津豊久妻) http://www.realinteg[...]
[3] 간행물 伊佐市郷土史誌史料集一所収「本城家家譜」
[4] 서적 南藤蔓綿録
[5] 문서 庄内の乱の顛末を記した『庄内軍記』までは「忠豊」の名で書かれている。
[6] 문서 家久の御兒様が対応したとされる
[7] 서적 本藩人物誌
[8] 서적 常山紀談
[9] 뉴스 「最強イケメン島津豊久」生き方に魅力 南日本新聞 2016-01-01
[10] 문서 長良川沿岸の岐阜市河渡という説あり。
[11] 서적 黒田家譜 1688
[12] 서적 惟新公関原御合戦記
[13] 문서 薩藩旧記雑録 東京大学史料編纂所 1869
[14] 서적 さつま人国誌 戦国・近世編 南日本新聞社 2011
[15] 문서 永吉島津家文書一四三号
[16] 웹사이트 島津豊久 http://www.shuseikan[...]
[17] 뉴스 さつま人国誌「島津豊久の最期と埋葬地・下」 http://373news.com/_[...] 2014-01-13
[18] 서적 浄のセクソロジー 学研パブリッシング 2009
[19] 웹사이트 天昌寺跡 http://hiokishi-k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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